은행알과 은행잎에 대하여 본문

블로거노트(Non category)

은행알과 은행잎에 대하여

별이네(byul) 2010. 10. 22. 21:11

산들산들 부는 바람을 맞으며 집을 나섰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싱그러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늘 하던대로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그렇게 걷는 이유는 내가 오가는 길가에 가로수로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있고,
요즘은 은행알이 익어 바람에 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목적지까지 가다보면 은행알 서너 개씩은 주울 수 있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가을이 익을때로 익었는지 지나는 바람에 은행알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대충 주워가면서 걸었는데 어느새 작은 봉지에 가득찼다.
급히 버려진 비닐봉지를 주워 그속에 넣었는데 한봉지 가득이다.

은행알이 몸에 좋다는 것을 우연히 알고 언젠가부터 가을이면 일부러 사먹지는 않지만, 
떨어진 은행알 줍는 것은 재미삼아 열심히 하고있다.
오늘은 유난히 수확이 많아 또 콧노래가 나왔다.


저녁에 묵혀두었던 책을 집어들었다.
나목(裸木)
저자인 박완서님이 개인적으로 가장 아낀다는 작품이다.
1990년 처음 읽고 20여 년 만이다. 

책도 나이는 숨길 수 없었던지 종이가 누렇게 변했다.
사람이나 책이나 세월이가면 싱싱함을 잃는 것은 매한가지인가 보다.

그런데 책속에서 은행잎이 하나 나왔다.
가만히 은행잎을 한참 쳐다보았다.
은행잎의 나이도 책만큼이나 먹었는지 물기하나 없이 바짝 말라있다.

이 은행잎은 공원벤치에서 책을 읽다가 주워 끼워넣은 것이 분명했다.
은행잎 하나로 나목을 읽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늦은 가을.. 공원 벤치.. 무성했던 은행잎들...

 

 

은행알과 은행잎.
매년 가을을 맞이하고 있지만 은행잎은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바싹 마른 은행잎을 밟을때의 소리와 느낌도 좋지만,
책속에 가을을 보관하는 느낌때문에 책갈피로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러고보니 언젠가부터 책갈피로 은행잎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오늘만해도 길가에 은행잎이 많이 떨어져있었는데...
내눈엔 오로지 은행알만 보였었다.

은행알을 주우면서 기뻐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어느새 이렇게 나이가 들었을까...
언제부터 떨어지는 은행잎에 그토록 무심했을까...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잎을 보지 못하고 은행알만 보았던 노안(老眼)이여... ⓒ뭘더

 

2010/10/30 - [한국소설] 박완서의 나목(裸木)에 대하여

최근에 올라온 글

TAG

more
Total
Today
Yesterday